"나"가 아닌 "우리"

공예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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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살아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도 저희를 오후예배 자리로 부르시고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심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하여 저희가 교회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이 시간을 통하여 알게 하시고 교회가 얼마나 풍성한 곳인지 깨닫는 시간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교회를 통해 모든 은혜를 그리스도께서 베푸신다는 것을 이 시간을 통하여 깨달아 교회라는 이름 아래에서 “내”가 아닌 “우리”라는 교회로 만들어주신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시간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이 시간 말씀을 들을 때 지혜를 더하시고 말씀을 선포하는 저나 여기에 있는 모든 회중들이 말씀을 잘 이해하고 아멘으로 받는 시간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1:4-6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겠습니다.
에베소서 1:4–6 NKRV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함께 읽겠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5장 1항, 그리고 주보에는 없지만 3항도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제1항 “공교회 또는 보편적 교회는 무형인데,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머리인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이는 택함 받은 사람들의 전체이며,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몸이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이다.”
제3항 “그리스도께서는 이 보편적인 유형교회에 교역과 말씀과 하나님의 규례를 주심으로 현세에서 세상 끝날까지 성도들을 모으고 보호하려 하셨고, 또 자기 약속을 따라 자기의 임재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역과 말씀의 규례가 효력이 있게 그 목적을 이루게 하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이렇게 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에서 여러분을 만나뵙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이 부족한 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듣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들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에게 교회는 어떤 곳이신가요? 아니면 어떤 존재로 생각하시거나 느껴지십니까? 우리가 각자 신앙 생활을 하면서 경험을 토대로 나름대로 교회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겁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모인 곳이다, 교회는 따뜻한 곳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듣는 곳이다 등등으로 말입니다. 이 모든 말이 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먼저 짚어야 할 부분은 “성경은 교회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라는 점입니다. 성경이 교회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살피지 않으면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는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바를 살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제 앞으로 몇 주간 저와 함께 성경이 말하는 “교회”에 대해서 살펴본 것인데요. 성경이 말하는 교회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가 속해 있는 이 교회가 얼마나 풍성한지 깨닫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나”가 아닌 “우리”입니다. 오늘 제가 전할 말씀의 핵심이 바로 이 말씀 제목입니다. 교회는 “나”가 아닌 “우리”인 곳입니다. 왜 그럴까요? 한국 그리스도인들,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회상 또는 교회론의 특징은 구원론보다 앞서지 않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면, 쉽게 말해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각 개인에게 역사하시는 구원에 관련된 것들인 회개, 중생, 양자됨 이러한 것들을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이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인 집합체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는 교회라는 공동체보다 개인을 더 우선시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개인이 아닌 교회를 말하고 있는데, 지금 교회의 풍토는 개인을 더 우선시합니다. 특히나 개인의 인권, 의견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여기는 현대 사회에서 더더욱 이러한 풍토가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풍토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언제나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베푸시는 모든 은혜들은 오로지 교회를 통해서만 베푸십니다. 왜 그런지 이제 본격적으로 들어가볼텐데요. 크게 두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인간은 공동체적인 존재라는 것. 두번째는 개인적인 신앙생활은 불가능하며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는것을 살펴보겠습니다.
1. 인간은 공동체적이다
먼저 첫째로 인간은 공동체적이라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은 결코 단독자, 또는 개인으로 있지 않은 것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공동체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공동체로부터, 공동체 안에, 공동체를 위해 태어나 단 한순간도 공동체를 떠나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단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가정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태어납니다. 아무리 특수한 상황이더라고 하더라도 태어나자마자 엄마와 함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아주 극단적으로 말하더라도 이 아이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고아원이라던지 보육원이라는 사회적 집단에서 속해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은 공동체적인 존재라는 것에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은 삼위라는 공동체로 계십니다. 그분은 이 삼위라는 영원한 관계 안에 속해있으신 분이십니다. 이 안에서 하나님은 서로를 높이시고, 서로를 향해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항상 공동체적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 창조된 것이 누구입니까? 바로 인간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결코 단독자로, 혼자로 있지 못합니다. 창세기 1:26 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26 NKRV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자신을 표현하실 때 어떻게 표현하십니까? “나의 형상을 따라 나의 모양대로 내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표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이렇게 공동체로 계시니 창조 이전, 다시 말해 영원 속에서 그분은 항상 공동체로 계셨음을 확증해주고 있고, 또한 인간도 그런 공동체로 계시는 하나님께 창조받은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인간의 창조를 계획하시면서 이미 공동체로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2:18 입니다.
창세기 2:18 NKRV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를 위하여 돕는 베필을 짓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목사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어떻게 지내나 한번 지켜보셨는데,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너무 딱하고 안쓰러워서 배필을 짓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해 돕는 배필을 짓겠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 계획을 실행하신 것이지, 절대로 상황을 지켜보고 결정을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분의 생각에는 인간을 지으실 때 공동체로 짓겠다는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더 나아가 심지어 불신자들에게서도 이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도 항상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가정이든, 사회이든, 기업이든, 동호회든 말입니다. 하지만 불신자의 공동체가 신자의 공동체와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 안에 왜곡이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면, 불신자의 공동체는 결코 서로를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공동체입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삼위라는 공동체로 계신 하나님은 서로가 서로를 높여주고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그렇기에 원래 인간도 서로를 높여주고 사랑하는 관계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주셨을 때 했던 아담의 반응도 무엇입니까? “내가 너무 행복하다”라는 하와에 대한 나의 반응이 아니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며 하와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인해 타인 중심의 공동체가 이제는 “나” 중심의 공동체로 바뀌게 됩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물으셨을 때 아담의 반응은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는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습니다.”라는 반응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은 죄책으로부터 회피하고 타인을 희생시키려는 자기중심적인 마음으로 완전히 180도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성향만이 이제는 인류 가운데 남게 되었고, 인류의 공동체는 이제 각자가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가진 공동체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류는 공동체적이면서도 동시에 반공동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서로를 향해 항상 칼을 겨눈채 자기자신을 방어하려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류의 공동체는 언제나 상대방을 나를 위해서 희생시킬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절대로 남을 높이거나 사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불신자의 공동체가 이처럼 자기중심적이긴 하지만 언제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공동체로 지으신 것이 여전히 죄인들의 공동체 안에 이렇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인간이든지 그 사람은 반드시 공동체 안에 속해있습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과거에 어떤 공동체에 속해있었거나 속해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혼자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공동체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공동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다음으로는 이렇게 공동체적인 인간으로 지어진 신자인 우리의 모든 신앙 생활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없다는 것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 두 번째 부분이 오늘 말씀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2.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유튜브 예배, 개인적인 예배 불가능)
두 번째로 이렇게 공동체적인 존재인 인간인 신자의 모든 신앙생활은 개인적인 것이 없다는 것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시작할 때 한국 교회의 풍토가 구원을 개인적인 것으로 여긴다는 풍토가 있다는 것을 짚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각 개인에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공동체, 즉 교회를 통해서 자신의 구원을 베푸십니다. 회개, 중생, 양자됨 이 모든 구원의 사역은 교회 안에서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에베소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서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에베소 교회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편지 전체의 밑바탕이 되는 가장 근간이 되는 말씀으로 이 본문 위에 에베소서가 서술됩니다. 특별히 에베소서는 교회론을 가르치는 성경으로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그 분의 몸인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교회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강해하기보다는 이 본문에서 교회를 무엇이라 말하는지를 더 집중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집중해야 할 단어는 바로 “우리”입니다. 3절을 보시면 하나님을 설명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하며 3절 끝에 보시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바로 하나님에 대한 관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으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 다시 말해 교회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교회인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교회인 우리 모두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 특히 성부 하나님을 말할 때 나의 아버지, 나에게 복을 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하거나 말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아니면 우리의 인식 속에 아버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무의식 중에 인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3절이 우리에게 밝혀주는 것은 “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3절은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알려주었다면, 4절은 구원에 대한 관점을 알려줍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는 구원을 개인적인 것으로 여길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4절을 읽어보시면 구원은 교회중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바로 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창세 전에 택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을 영원 전부터 택하시고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교회를 떼어놓고 결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인 교부들이 교회를 구원의 방주라고 말한 것이 이런 맥락에서 보면 결코 오버스러운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로 부르시고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지 각 개인을 따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식하기로는 우리 각 개인이 교회로 와서 말씀을 듣고 회개와 중생의 과정을 거친다고 여길 순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로 부르셔서 구원을 베푸셨기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개인적일 수는 있으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는 교회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을 결코 개인적인 영역에 두어선 안됩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생각해야 하며 교회와 구원을 결코 떼어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구원받은 자들이 교회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구원이 일어납니다.
교회 안에서 구원이 일어난다는 이 말을 들으실 때 마음에 의구심이나 반항이 일어나는 분들도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예전에는 그랬으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교회중심, 심하게는 교회주의 같은 이런 말을 할 때 어떻게 보면 로마 가톨릭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4절에서 구원은 교회에서 일어난다는 성경 해석은 종교개혁자들이 한 해석입니다.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성경해석에 반발했던 종교개혁자들이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교회 안에만 국한시키고, 교회에만 제한시키는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크신 분이어서 교회를 넘어서서 구원하실 수도 있으신 분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이 말에 저도 충분히 동의합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이해를 뛰어넘으시는 분이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 하나님의 영역이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적힌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다.
또한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구원하시는 방법을 택하셨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21 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1 NKRV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여기서 전도는 “설교”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를 통해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기적을 일으키시고 환상과 같은 신비적인 방법을 못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왜 설교를 통해서만 구원이 일어나냐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로 하셨으니 우리는 그 방법대로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기로 결정하셨으니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결정 앞에 복종하며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5
고린도전서 1:25 NKRV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보다 훨씬 지혜로우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도 교회를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머리인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이는 택함 받은 사람들의 전체”
지금까지 우리가 에베소서 말씀을 통해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똑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이는 택함 받은 사람들의 전체입니다. 논리적으로 볼 때 구원이 교회보다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먼저 세우시고 그 다음 이 교회로 사람들을 부르셔서 구원하셨습니다. 제 3항에서도 이것을 확증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보편적인 유형교회에 교역과 말씀과 하나님의 규례를 주심으로 현세에서 세상 끝날까지 성도들을 모으고 보호하려 하셨고, 또 자기 약속을 따라 자기의 임재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역과 말씀의 규례가 효력이 있게 그 목적을 이루게 하신다.”
이것은 구약부터 계속해서 이어져온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외에 다른 이방 민족들을 구원하실 때 항상 이스라엘 백성 안으로 편입시키셨습니다. 대표적으로 사사기에 등장하는 라합이나 모압 여인이었던 룻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방 민족이었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자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구원하셨고 이들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편입시키셨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다는 사실이 이스라엘 민족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무슨 말씀을 하시면서 부르셨습니까? 바로 아브라함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 혼자 구원하시겠다고 하시지 않고 아브라함을 통해 구원받을 민족을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을 때에도 그에게는 이미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더 나아가 예배도 교회 밖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서 구원을 베푸시는데 어떻게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가능하겠습니까? 예전에는 설교를 들으려면 무조건 교회로 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매체가 발달한 요즘 우리는 유튜브를 통해 설교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비대면 시대였던 코로나를 거치면서 유튜브 설교가 더 부각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새순교회 분들은 아니시지만, 어떤 분들은 이 유튜브를 통해 예배가 송출되는 것을 집에서 봄으로 자신이 오늘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배는 반드시 교회라는 이름 아래에 함께 모여야만 가능합니다. 혼자만의 예배는 없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집에서 혼자 기타치며 찬양하고, 혼자 성경을 읽고 말씀 묵상하는 것을 예배라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주일예배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거나 같은 무게감으로 사용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방식을 예배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성경은 항상 예배는 교회 안에서만 행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한번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개인적으로 제물을 잡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택함받은 제사장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 예배가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그리했던 것처럼 신약에서도 계속해서 예배는 교회 안에서만이 가능합니다. 교회 밖에서는 예배가 불가능합니다.
저는 구원과 예배가 교회에서만 일어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현상적으로는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무조건 교회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또한 교회 역사 속에서 어떤 교리적 결정들. 모두 교회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모두 교회가 공적으로 결정한 신앙고백들입니다. 웨스트민스터 문서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도르트 신경 이것들도 모두 교회의 공적인 교리입니다. 뛰어난 한 개인이 나름대로 정리한 교리들이 아닙니다.
이처럼 성도의 모든 신앙생활은 교회와 떼어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에는 오직 “나”만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자기중심적이며 독단적인 “나”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에 들어올 때 “나”는 사라지고 “우리”가 됩니다. 물론 우리가 모두가 획일화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다 각자의 개성과 특이점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내”가 사라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우리로서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항상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게 된 우리는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우리”로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각 개인을 교회로 부르시고 모든 은혜를 베풀어주셨고, 지금도 베푸시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교회로 부르셔서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하고,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모두 교회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그리스도, 교회가 되게 하신 그리스도.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나”가 아닌 “우리”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며 우리 교회 공동체가 얼마나 풍성한 공동체인지를 더욱 깊이 깨달으며 이 교회에서 다양한 은혜를 베푸시는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우리 새순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시간 들은 오늘 말씀 가지고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교회입니다. 내가 아니라 우리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통해 모든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교회는 그만큼 중요한 곳입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합시다. 우리를 교회로 불러주신 그리스도께 감사하며 이곳에서 모든 은혜를 베푸시는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기도를 합시다. 또한 그렇기에 우리가 이 교회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교회로 모이기로 힘쓰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이 시간 오늘 들은 말씀을 두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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